독서 reading

'미움받을 용기'

storyming 2020. 3. 21. 11:46

미움받을 용기 메모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목적에 따라 산다. 히키코모리처럼 집안에 틀어박혀있는 것도 자신의 선에 따라 행한 것이다. 만약 그 결과가 힘들고 불행할 지라도 그렇게 한다. 적어도 집 안에서는 특별해지고 부모님의 관심을 받을 수 있으니까. 제품을 구입하던 어떤 선택을 하던, 그 선택이 꼭 자신이 사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야해서일 때도 있다.

 

감정은 도구이다. 무의식이 목적을 이루려할 때 사용되는 도구. 언제든 집어 넣었다. 꺼냈다 할 수 있다.

 

사람은 인정받고 싶어하기도 하고, 관심의 대상이 되고 싶기도 하고, 성공하고 싶어하기도 한다. 이런 것들은 사람이 사회적인 동물이기에 당연한 욕구일 것이다. 대부분의 심리는 인간관계에 관한 것일 만큼. 런 욕구들은 자신의 부자유와 불행을 조장할 수 있. 살을 빼고는 싶은데(인정 욕구) 자꾸 음식을 먹는 때(식욕) 사람은 갈등을 하게된다. 또 무언가를 사고 싶은데(식욕, 소유욕 등) 돈이 넉넉지 않을 때(안정욕구) 등도 갈등을 하게된다.

 

사람들은 이상적인 자신의 모습이나 성격으로 변하고 싶어 하지만, 행동을 달리 했을 때 주위의 반응을 예측할 수 없기에 변화를 꺼린다. 결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자신은 보통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부분이 부각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소설가가 꿈인 y씨는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글을 쓰지 않는다. ‘시간이 없어 투고하지 않을 뿐, 시간만 있으면 나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남겨두고 싶은 것이다. 좀 떨어지면 어떤가, 다시하면 되는 걸 실패하는 것보다, 해야할 일을 앞에 두고 할 수 없는 이유를 찾는 것이 더 고달픈 삶이지 않은가. 본인 스스로가 인생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다.

 

무기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성질 우월성 추구

 

어짜피 나는 해도 안되.’라며, 열등감에 찌든 모습-> 열등 콤플렉스

 

학벌만 좋았어도, 성공했는데처럼 말하는 건 학벌을 제외하면 자신은 대단하다는 자랑. 자랑은 열등감을 느끼는 상태에서 나온다. 랑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건 열등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혹은 불행자랑 자신의 불행을 얘기하며 자신을 특별한 사람처럼 대함.

 

오늘날 연약함은 실로 엄청난 권력이다. ’ 아기는 지배하지만 지배받지는 않는다. 먹고싶을 때 울고, 자고싶을 때 잔다.

 

아들러는 사랑을 서로 구속하지 않고 같이 있으면 자유롭게 행동하게 되는 관계라고 했다.

 

전제가 있으면, 전체가 될 수 없다.

 

유대교 교리 중; 내가 나를 위해 살지 않으면, 도대체 누가 나를 위해 살아 준단 말인가

 

자신은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기위해 사는게 아니고. ‘타인은 나의 기대를 충족시키기위해 사는게 아니다.

 

과제의 분리, 누구의 과제인지를 잘 나누어야한다. ‘말을 물가에 데려갈 순 있어도 물을 마시게는 못한다.’ 도와주고 노력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언제나 결정은 자신들이 알아서 해야한다.

 

가족이라면 더욱 선을 확실히 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지는 그들의 문제다. 자신이 이러쿵저러쿵 따질 문제가 아니다.

 

과제를 분리하는 건 자기 중심적인게 아니다. 오히려 타인에게 간섭하는 것이 자기 중심적인 것이다. 부모라 할지라도 아이의 과제에 참견하는 것은 자기 중심적인 것이다. 자신의 아이는 자기 인생을 원하는 대로 살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단적으로 자유란 타인에게 미움을 받는 것.’ 자유를 행사하려면 인정받지 못 하는 대가가 따른다.

 

내가 누군가에게 다가가는데 있어서 그 사람의 생활 양식은 어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내가 다가가면 어떤 태도를 취할가 등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오로지 내가 결심하느냐 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상대의 태도 생각은 상대의 과제일 뿐이다.

 

타인을 조종할 생각으로 자신의 말과 행동을 바꾸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다.

 

불행의 근원은 인간관계에 있다. 반대로 행복의 근원도 인간관계에 있다.

 

인전욕구에 사로잡힌 사람은 얼핏 타인에게 관심이 많은 것 같아도, 사실은 타인에게 인정을 받으려는 자신에 대한 생각밖에 없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집착이자 인정받고 싶은 욕구해소에 불과하. 자신을 극대화해서 모든 사람이 자신을 좋아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렇게 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만 생각하는 삶이야 말로 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자기 중심적인 생활태도이다. 남은 나를 좋아할 의무가 없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라는 것이 맞다. 하지만, ‘는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 ‘는 인생의 주인공이지만 어디까지나 공동체의 일원이자 일부분이다. 가령 인생의 주인공을 넘어서 세계의 중심이 되려 하지만, 결국 좌절할 것이다. 타인은 나의 기대를 채워주기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도 타인의 기대를 채워주려 해선 안 된다. 그것은 그것은 오만이다. 그 사람을 돕고 그 사람의 결정을 대신해주며, 타인의 인생을 자신의 인생 안에 밀어넣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자신세계의 중심이 아니기 때문에, 남에게 간섭은 하지 않으나, ‘세계의 중심이 아니기에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여야 한다. 그로인해 인정’ ‘열등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소속감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 소속감은 치우쳐 있으면 안 된다. 그럴 경우 그것 또한 기대와 간섭을 낳는다. 학교에서 왕따를 당한다고, 집에 틀어박혀버리면 물론 집에서는 소속감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만약 더큰 세상을 생각한다면 학교라는 작은 공간 따위야 자퇴서를 내든 전학을 가면 충분한 거다. 학교를 나오면 결국 찻잔안의 태풍이였을 뿐이다. 찻잔 밖으로 나오면 겨우 실바람이였을 거다.

 

어떤 문제가 있으면, 이의를 제기하라, 이의를 제기해서 깨질 관계에 전전긍긍하며 살 필요는 없다. 세계는 넓다. 보다 다양한 사람들, 보다 큰 공동체는 분명 존재한다.

 

자식을 양육하든 동물을 기르든, 야단치면 당연히 안 되고, 칭찬하는 것도 안 된다. 칭찬에는 능력있는 사람이 능력없는 사람을 인정한다는 평가가 깔려 있다. 칭찬에는 감사도 존경도 없다. 우리가 남을 칭찬하느냐 야단치느냐는 당근을 쓰느냐, 채찍을 쓰느냐는 차이에 불과하다. 그 배후에는 타인에 대한 평가가 있다. ‘너는 잘 할 수 있을거야.’, ‘원하는 걸 하렴. 한 발 내딛는 것 부터란다.’ 자신감을 복돋아 주는 말들은 많다. 이런 말들은 칭찬이나 야단이 아니라 도움이. 말이 물을 먹을지 안 먹을지 몰라도 물가에는 데려가줄 수 있다.

 

누군가가 과제를 앞에두고 망설이는 것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과제에 맞설 용기를 잃은 것이 문제다.

 

사람들은 같지는 않지만 대등하다. 전업주부 환경미화원 대기업 사장 초등학생 모두 같지는 않지만 대등하다.

 

칭찬은 타인으로부터 좋다.’는 평가를 받는 것, 그 평가의 기준은 타인한테 있고, 그런 칭찬을 받을려면 자신의 자유에 브레이크를 걸어야한다. 그냥 고맙다.’,‘감사합니다.’,‘기쁘다같은 표현들이 있다. 이런 표현들은 순수한 감사의 표시이다. 인간은 평가받지 않고 자신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될 때에만 용기를 얻는다. 스스로 가치있다는 것을 느낄 때는 어떤 공동체 안에서, 가족으로서 친구로서 애인으로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익한 사람이라고 느낄 때이다.

 

만약 내가 나이가 들어 병상에 누워있다면, 나는 가치가 없는 사람인 것일까? 아니다. 이건 사람을 행위의 차원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무엇을 했는가하는 차원에서 보면 분명 병든 노인은 가치가 없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외할머니를 생각해라. 살아계신 것 만으로도 감사하다. 있어주시는 것만으로도 든든하다. 사람을 나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는 지 어떤 직책인지 보다, 단지 존재의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부모님 말에 말대꾸를 하지 않고, 공부 잘 하고, 좋은 학교, 큰 회사에 취직하는 이상적인 자식을 만들어두고(그런 사람 있을 리가 없다.) 자신의 자식과 비교하며 100점부터 천천히 깍아 내린다. 이것이 평가다. ‘부모님 말을 잘 듣는다.’, ‘건강해야한다.’ 이런 기준들을 가지고 있다면 자식을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말대꾸 좀 하면 어떻고 건강하지 안으면 어떤가. 그렇다고 자식을 미워할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래도 사랑할 것이고 그래도 이뻐할 것이라면, 자신의 자식을 불쌍하다는 눈초리로 바라보지마라. 그 자식은 열등하지 않다. 조금 말대꾸를 할 뿐, 몸이 조금 불편할 뿐 모든 사람과 대등한 사람을 보면서 동정어린 시선을 보내지마라. 0점부터 꾸밈없이 누군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만약 자신의 자식이 학교에 안 가고 있다. 그렇게 집에만 틀어박혀있다가, 갑자기 설거지를 도와준다. “설거지는 됐으니까, 학교에나 가!”라고 한다면, 이상적인 아이의 모습을 정해놓고 점수를 까는 것이다. ‘고맙다라고 표현한다면, 아이는 용기를 느끼고, 한발 내딛을 지도 모른다.

 

자기 수용에선 변할 수 있는 것과 변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해야한다.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주어진 것을 이용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얼굴, , 성격은 변하지 않지만, 뚱뚱해질지 근육질이 될지는 정할 수 있다. 성격 또한 그렇다. 최고의 성격으로 바꿀 순 없지만, 최선의 성격으로 만들 수는 있다. 바꿀 수 없는 것에 주목하지 말고 그것들을 이용하는 방법에 주목해야 한다.

자신을 인정하고 바꿀 수 없다면, 이용해야한다. 60점을 받을 수 있는 얼굴이라면 60점을 자주 받으면 100점 한번 받는 것보다 점수가 높아진다. 심리학에는 단지 자주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호감을 산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신용은 은행의 융자와 같이 담보를 받고 이만큼만 너에게 빌려주겠다라는 식이다. 하지만 신뢰는 다르다. 조건을 달지 않고 주는 것이 신뢰이다. 내가 누군가 관계를 맺고 싶다면, 신뢰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단칼에 관계를 끊어도 된다. 그건 내 과제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내가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것은 자기수용의 기본이였다. 그중에 배신은 어떤 것일까? 그렇다. 내가 관계를 내 마음대로 끊는 것처럼, 내가 배신을 하는 것도 상대방의 과제이다. 즉 내가 믿는건 내 자유라서 한 것이고, 상대가 배신을 하든 말든 그건 상대 마음인 것이다. 결국 이 이론의 결론은 이렇다. 누굴 믿을지 누구에게 다가갈지 등 모든 인간관계는 나의 선택이다. 그리고 그에 어떻게 반응할 지는 내 알바 아니다. 그들의 반응은 그들 맘이다. 그가 만약 날 배신했다해도, 건 그의 생각일 뿐이다. ‘배신으로 받아들일지 잠시 힘들었으니까라며 잠시의 고비로 여길지는 또 나의 선택이다. 그가 배신을 하든 사랑을 하던 결국 난 그걸 내식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물론 싫다고 하면 그땐 그냥 싫은 줄 아는게 낫다.

 

타자공헌이란 나를 버리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가치를 실감하는 일이다. 누군가에게 유익한 인물이 되는 것이다. 나의 가치를 실현시켜라. 집에서 밥을 먹었다. 모두들 먹고 누구는 방으로 가고, 누구는 티비를 보러 갔다. 그때 나는 남아 설거지를 해야한다. 그때 왜 나만 이걸 해야하지.’난 가족에게 도움이 되고있어.’라고 생각하는 것 두가지가 있을 수 있다. 만약 가족이 내편이라면? 그렇다면 후자일 것이다. 내편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이라면 나는 그들을 도와주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내가 무슨 도움을 받을지 보다, 내가 무엇을 도와줄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도움이 되는 지 안 되는 지는 타인의 선택이다. 가치를 실현시키려면, 주위의 사람을 내가 선택하고 내편으로 내가 굳게 믿어야만 한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다.

 

유대교 교리 중 열명의 사람이 있다면 그 중 한 사람은 반드시 당신을 비판한다. 당신을 싫어하고, 당신도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열명 중 두 사람은 당신과 서로 모든 것을 주고 받는 더없는 벗이 된다. 남은 일곱명은 이도 저도 아니다.” 이때 나를 싫어하는 한명에게 집중할 것인가. 이도 저도 아닌 7명에게 집중할 것인가. 나를 좋아하는 2명에게 집중할 것인가가 관건이다. 그 시각의 차이가 세계를 판단한다.

일 하느라 시간이 없다.’는 말을 하는 사람은 인생이 부조화스러운 것이다. 일 양육 교우관계 사랑 모두에 시간을 쏫아야 한다. 한 쪽에만 신경을 쓰는 것이 좋았다면, 우리는 모두 자폐증에 걸려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유전자가 평범함을 추구하는 것은 우리는 존재 자체만으로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한다. ‘일을 하기 때문에’,‘무언가를 생산하기 때문에우리가 사는 것은 아니다. 무언가를 배우고 있는 나도, 은퇴를 한 누군가도, 일을 하기 때문에 산다면, 사람은 길어도 인생의 30~40년만 가치있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건 아니지 않은가.

 

만약 10만원을 가지고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과 몇 억의 재산과 좋은 집 좋은 차 명품 시계를 가지고서도 행복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과연 누가 성공한 삶일까.

 

많은 아이들이 무언가를 처음 시작하면 특별히 잘 한다.’ 공부도 열심히 하고, 학원도 잘 다닌다. 그런데 평범하게 하는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는 특별히 못 하게 군다.’ 특별히 잘하는 것도 특별히 못 하는 것도 목적은 같다. ‘평범한 상태에서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아이가 문제 행동을 저질렀다면, 우리는 그 아이를 혼낸다. 그러면서 지극한 관심을 준다. 결국 혼이 나더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그 아이는 특별한 존재이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가 문제행동을 계속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 모두는 실은 평범하다. 아이든 부모든 사업가든 직장인이든 평범함을 받아들일 용기를 주어야한다. 인생은 찰나의 연속이고, 여행이다. 무언가를 이루었을 때만 행복한 그런 결과를 바란다면, 모든 것을 과정으로 보고 한순간 한순간 행복하려는 사람보다 행복하지 못 할 수 밖에 없다. 자신이 평범함을 알고 노력하려는 사람은 언제나 과정을 걸으며 매순간이 중요해지지만, 특별해져야만 하는 사람은 결과를 얻는 그 찰나의 순간 밖에는 중요하지 않다. 대학을 가려고 할 때에도 수험은 아직 먼 미래이고 힘들고 귀찮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평범한 내가 오늘 하루 수식을 외우고 조금 더 익숙해졌다면, 그는 오늘 해낸 일이 있는 것이다. 먼 미래의 대학 합격만을 바라는 사람에게는 없을 오늘 해낸 일이 있는 것이다. 매일 매순간 자신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출 수 있다. 인생을 여행으로 보고 주변을 둘러볼 수 있다. 당장 미팅을 해도 그 여자를 꼬시기위해 그 시간을 다 보낸다면, 그런데 차였다면, 슬플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 미팅을, 대화를, 새로운 자극을 즐긴다면, 노력을 즐길 수 있고, 인생을 결과에 대한 불안에 떨지 않고, 매순간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어떤 상황이든 우리는 매순간 행동을 취해야한다. 영화는 끝나지도 않았는데, 중간의 고비를 보고 베드엔딩인지, 해피엔딩인지를 논할 수는 없다. 고비가 온다면 다시 도전할지 방향을 바꿀지 선택할 뿐이다. 실패인지 성공인지 판단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