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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찬호(사회학자)의 '차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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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찬호(사회학자)의 '차별'

storyming 2020. 4. 3. 16:28

 '어쩌다 어른'-오찬호님께서 '차별'을 주제로 강연한 내용을 듣고 정리한 내용입니다. 18-06-13 

 

체벌에 있어서 보통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한다. 체벌의 현장에서 가장 자주 들을 수 있는 대사가 너 맞을 짓 했지?’이다. 즉 피해자에게 원인이 있다고 규정한다.

왕따의 핵심은 집단이 소수에게 폭력을 가한다. 우리가 만약 너도 크면 가해자가 될 수 있다.’라는 교육을 시켰으면 어떨까. 그러나 그런 교육은 사실상 없다. 모 교육기관에서 왕따 예방 교육을 하는데, ‘친구가 헌담을 하면 그것에 익숙해지세요.’라고 했다. 육아서 같은 것을 봐도 왕따 당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 육아서에서 왕따하지 않는 법을 배우진 않는다. 그렇담, ‘사회성이 좋다.’는 것은 무엇일까. 갈등을 잘 해결하는 것? 허허 만약 돈 많고, 외모가 좋고, 지위가 좋으면 사람이 붙는다. 만약 그렇지 않은 사람이면 사람이 잘 안 붙는다. 원만한 성격으론 힘들다. 그럼 그 사람은 사회성이 없는 것일까. 만약 처세술을 배워 인맥을 쌓았다면, 그 사람은 사회성이 좋은 건가?

어떤 초등학교 1학년 선생님이 부모에게 저 아이는 왕따를 당할지도 몰라요.’라고 했다. 무슨 큰 잘못이나, 폭력이라도 휘두르는 것일 것이다. 선생님은 저 아이는 책만 봐요.’라고 했다. 만약 누군가 와서 넌 왜 책만봐.’라면서 따돌리면 그 아이를 혼내야지. 책 보는 아이를 혼내는 게 머여? (부자연스럽다.) 우리가 얼마나 왕따를 예방의 차원에서만 보는가. 사실 그 아이가 책을 덮고 활발해진다고 해도, 또 다른 약자가 왕따가 될 뿐이다. 대한민국의 사회성은 왜곡되어 있다. 사회적 관계를 가지므로 적절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가 사회성인데, 돈과 지위를 떠나 수평적으로 대할 수 있는가?, 어떤 악이 있을 때 그것에 대항하여 폭력 등을 행사하는 것을 보면 사실 강자가 약자에게 행한다. 데이트 폭력도 이유는 있으나 결국 강자가 약자에게 폭력을 행한다. 결국 약자는 강자에게 그것을 행하지 못 한다. 즉 사적 복수가 평등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결국 이건 이유가 있어도 결국 약육강식이 되어버린다.

우리는 막내다움이 당연하다는 듯 막내가 불편한 자리에 앉거나 귀찮은 일을 도맡아 한다. 그런데 중요한건 그것을 자처한다는 것이다. (차별의 합리화)

인류의 3대 차별 인종, 성별, 계급 가장 합리화되는 것이 계급 차별이다. 노력 등으로 우린 그 차별을 합리화 시켜버린다. 노력이 차별의 명분이 되기도 한다.

 

동화 아기 돼지 삼형제도 첫 째의 볏집과 둘 째의 나무 집이 늑대에게 날라간다. 하지만 아무도 왜? 라는 얘기를 안 한다. 성실하고 모범적인 막내만 벽돌집을 지었다. 사실 문화에 따라 유목민족은 볏집이 수상가옥은 나무집이 더 낫다 그럼에도 우린 벽돌집이 더 좋다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 또한 아기 돼지 삼형제가 나온 시기가 산업시대여서 모범적이고 성실해야 근대 공교육을 잘 받고 성실한 노동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만연했다. 유렵이 약소국에 가서 발전이 덜된 나라를 지배하고 그들에게 우리가 더 높은 문화를 가졌으니 그래도 돼라고 한 것처럼 , 우리의 가치 판단은 사회적인 영향이 크다. (사회적 가치 판단) 초가집과 낮은 문화가 인류에 어떤 해악을 펼쳤던 것이기에 그들을 지배하는 것이 정당해지는 가?

패션도 마찬가지다. 옷을 자기 스타일대로 입는 사람보고, 패션 테러리스트라고 하는데, 그들이 사회에 어떤 해악을 끼쳤길래, 테러리스트라고 까지 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가 인기있는 아이돌 이름을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알게 되듯, 내 의사와 달리 사회로부터 제공 받게 되는 정보들이 있다. 그것들이 고정관념이 된다.

어떤 남자가 데이트 중에, 십원까지 더치페이를 하면 남들은 쪼잔하다.’라고 한다. 그냥 그사람은 계산이 확실한 사람인데 왜 그를 쪼잔하다고 하느냐라고 반문하는 사람은 없다. 잘못된 시각을 고쳐야한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틀렸다는 이미지를 부여 받을 때, 차별이 사라진다.

서울 지도에서 교회를 검색하면, 엄청 많이 나온다. 그저 신앙심이 투철한 것일까. , 아이, 대출 등 빌게 많다. 사실 교육의 공공성이 있으면, 의료에 공공성이 있으면, 주거에 공공성이 있으면 이렇게 절박하지 않아도 된다. 사회가 상식적이라면 그러지 않아도 된다. 좋은 대학을 갔으면 좋겠다는 그 간절한 기도는, 좋은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생활이 힘들어지는 사회적 현실 때문이다. 차별에 대해 조사하면 반은 소득에 대한 차별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린 가난한 사람들을 다른 이미지로 보면서 양극화가 해결되지 않는다. 비정규직이 힘든 건, 워킹 푸어다. 일을 해도 가난하다. 그런데 아무리 성실히 일을 해도, 파견직, 용역직은 가난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지게 된다. 그게 당연할까?

법을 공부해 보면 헌법 제 111항에 누구든지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말을 되어 있다. 실제로는 그러한가.

여기서 엄청난 딜레마가 생긴다. 일을 해도 가난하다. 일을 해도 가난하지 않을 몇 가지 직업에 몰려들기 시작한다. 때문에 그 직업에 엄청 몰리면서 과하게 평가하게 된다. 영어, 성적, 스펙 등등이 필요하다. 결국 그게 교육에 있어서 더 빠른 경쟁 분위기를 만든다. 우리는 자기계발이 지배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사회 구조를 개선하자는 얘기를 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그저 야 너 그러면 큰일 난다.’하면서 개인의 문제로 치부한다. 그 개인이 모이면 사회문제가 된다. 그런 개인이 계속 재현되는 것은 대부분의 개인이 그런 문제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고, 우리는 대부분의 개인에게 노출되어 있는 시스템을 사회 구조라고 한다.

물론 자기계발 중요한데, 어떤 책에선 믹스 커피를 타지도 않고 그냥 먹었다고 한다. 시간이 없어서. 물론 믹스커피를 타지도 않고 먹어서 성공을 한 것은 사실이다. 반면 성공하지 못 한 사람이 그만큼 노력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실제론 비슷비슷한 사람들이다. 단지 기회를 얻지 못 했을 뿐. 취업을 위해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노력하는 것이 잘된 사횐가.

예전 대학에선 이런 사회를 부정했으나, 지금의 대학은 취업사관학교가 되었다. 우리 학교도 리더, 창업 등을 열심히 밀어준다. 과연 그것이 올바른 사회를 위한 일일까. 옳지 못한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일일까.

2004년 신조어로 등록된 단어가 있다. ‘스펙’, 한글로 치면 공모전 영어 토익 등이 뜨지만, 영어로 치면 자동차 사양, 오토바이 사양 등이 나온다. 그때 나온게 취업 3종 세트가 있다. 학점, 학벌, 영어 근데 지금은 취업 9종 세트가 되었다. 만약 대학이 옳게 처방을 했던 것이라면 과거 보다 지금이 나아야한다. 그런데 더 힘들어 졌다. 이제 새내기들은 취업 9종 세트를 준비하기 위해 노력한다. 애초에 취업 9종 세트 갖추기가 힘들다. 그렇기에 청년들이 그나마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공무원 시험에 메달린다. 그런 젊은이를 보고 젊은 얘들은 열정이 없다. 안전적인 것만 바란다고 하는 어른들이 있다. 공무원이 되고 싶은 아이들은 정말 공무원이 꿈이었을까. 꿈으로 가져야 했을까.

공무원을 준비하던 사람이 너무 합격이 안 되니 가족에게 거짓말로 붙었다고 했다. 돈도 보내고 그러다 1년 뒤 자살했다. 그 기사에 달린 댓글 중 가장 공감을 많이 받은 댓글이 다음 생에는 다른 나라에서 태어나라.’였다. 가난과 고통의 원인을 개인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게으름, 불성실 하다고 하는데, 그것은 사실일까 이미지일까. 우린 가난을 그저 경쟁의 결과로 보고 있다. 과연 그 경쟁이 올바른 것일까.

외국인 친구가 너희 한국은 왜 그렇게 경쟁이 심해라고 물었는데, 한국인이 말하길 나 어렸을 때 받아쓰기를 했는데, 1등한 친구를 일으켜 세운 뒤에 모두 박수를 치게 했어.’ 그러니 외국인 친구가 깜짝 놀랐다. 학교 선생님이란 사람이 1등을 박수 받게 하는 것은 다른 아이들이 1등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고 또한 그것이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사실 1등 보다 10등이 노력했을 수도 있다. 시작점의 평등, 과정의 평등, 가정이 불우한 아이가 공부가 잘 되겠어?

결과와 평등이라는 말이 조합되려하면 다들 격하게 반응한다. 노력의 결과, 투자의 결과라고 하는 데 우린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살 권리가 있다. 존엄이란 무엇일까. 그냥 3끼 먹으면 다인가. 영화도 보고, 고양이도 키우고, 핸드폰도 하고 친구도 보고 그럴 수 있어야하는 거 아냐, 그게 사치고 탐욕이라는 거냐고. 그 시대에 어울리는 문화를 향유할 수 있을 때 존엄함을 받는 것이다.

시민이란 비판적 사고와 합리적 의사결정 능력을 가진 상태에서 자발적이고 주체적으로 공적 정책에 참여하는 대중과 구별되는 사람이 시민이다. 우린 시민인가. 대중인가 물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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